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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그 힘으로 현실을 헤쳐나갈 용기가 필요할 때 기억에 위로받자. 그러니까 적당히 중독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창문 너머로 음악이 들려왔다. 휴대폰 스피커폰으로 음악 감상이라도 하나. 그것도 평일 오후 3시에 말이다. 2층 청년인가보다.(얼핏 청년이 나오는 걸 본 것 같다.) 최신가요만 흘러나온다.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익숙하고 아득한 곡이 들렸다. 이문세의 <알 수없는 인생>. 희망적인 곡이지만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곡이다.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그런 날이 올까요'라는 가사가 말이다. 2006년 드라마<발칙한 여자들> OST에 삽입된 곡인데 순수한 질문을 던지는 가사 치고는 등장인물은 유부녀이고 그녀들의 발칙한 상상을 솔직하게 유쾌하게 풀어낸 이야기다. 이런 곡을 듣고 있는 윗집의 누군가는 '그'가 아니라 '그녀'일지도 모르겠다.
서른이 되면 아니 나이가 들면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조금은 근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이곡을 불렀던 이문세도 <발칙한 여자들>의 주인공들도 여전히 질문을 묻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뜩, 2006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떠올려봤다. 이 드라마가 방영하던 시기는 여름이었다. 24살 그 해, 대학 졸업을 하고 친구를 통해 학교에서 조교로 근무하며 근근이 용돈을 벌었고 학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어학원을 다녔다. 취업에 대비해 뒤늦게 오피스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고 정규코스로 운전면허도 땄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돈을 많이 벌어 운전기사를 두겠다며 운전면허 딸 생각을 하지 않던 친구는 내가 딴다고 하니 속성으로 일주일 만에 취득했다. 집에 있을 때는 종종 더위에 지쳐 비스듬히 누워 책을 보거나 몇 번을 들춰봤던 앨범 사진을 보며 시간을 떼웠던 것 같다. 세상을 통달한 눈빛으로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세상 밖에 나오고 싶은 욕망 또한 컸다. 그해 9월 나는 도망치듯 호주로 떠났다.
살면서 어떤 건 기억이 잘 나지 않고 어떤 건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엔 음악과 드라마가 있었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나오거나 혹은 내 삶을 투영할 수 있는 드라마나 음악이 인생 여정을 몇 등분으로 나눠주는 것 같다. 물론 의미를 담지 않았던 순간도 특정 시기를 떠올릴 때면 뜬금없이 나타난다. 남자친구 집에 놀러 가서 들었던 음악이 그렇다. <Jessica Andrews>의 karma란 곡이었다. 그 곡만 줄기차게 틀어놓은 것도 아닌데 그것만 수십 번을 들은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책장에서 <이상>의 날개를 꺼냈다. 학창시절 문학책에서 얼핏 알고 있었던 작가 '이상' 때문에 22살 그해 여름, 나의 가슴 한구석이 낯설게 저려왔다. 딱히 거창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 음악이 흘러나왔던 우연히 집어 든 책 한 권. 그 순간이 2년 동안의 그 친구와의 연애시절을 압축해버렸다.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순간이 모든 채워버릴 때 기억의 왜곡을 심하게 느낀다. 사람들이 말하는 과거라는 게 절처히 각자의 독단적인 미화의 결정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른 뒤 뇌가 만들어내는 기억이란 게 미화의 결정체라면 굳이 별일 없이 지내던 그때 들었던 음악이 왜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걸까. "그땐 우린 정말 좋았었죠"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의 가사처럼 그땐 그래도 좋았다고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추억하는 이유는 힘든 현실에서 그나마 위안처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별일 없이 지내던 그 시절의 감정을 음악으로 접촉함으로써 내가 잊었던 자신을 다시 꺼내보려는 노력이지 않을까.
최근에 예전에 방영했던 드라마를 다시 보고 있다. 그때도 재밌게 봤지만 또다시 보니 웃기면서도 슬프다. 뭐든지 적당히 해야하는데. 적당히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그 힘으로 현실을 헤쳐나가기 위해 좋았던 기억이 필요한거 아닌가. 위안도 중독이니까. 윗집 그녀의 음악 스펙트럼이 적잖이 넓은 것 같다. 처음 최신 유행가요에서 2000년대 중반으로 내려가더니, 그리고 이제는 가곡이다.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간 가곡이 내 방으로 흘러 들어온다. 예전이 참 좋았다 그래도 현재가 더 행복하면 좋겠다. 과거로 리플레이는 이렇게 가끔 뜬금없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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